2019년 10월 31일 목요일
마/신부의 성경강의 마르코 복음 14장
음모
이제까지의 예수님의 활동으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단단히 약이 오를대로 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굳건히 지켜온 자리가 무너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러했으니 그들이 쌓아온 세상의 탑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무너지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쌓아온 분열과 대립의 탑, 교만과 허식의 탑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누구라도 이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지 않고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꾸준히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이들은 자신 안에 쌓여 있던 거짓의 탑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속임수
그런 진리의 예수님 앞에서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수단은 ‘속임수’ 뿐이었습니다. 속임수라는 것은 진리를 가장한 거짓입니다. 언뜻 진리인 것처럼 우리에게 드러나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 바로 속임수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재물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이상향이 바로 속임수이고, 명예로운 자리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안락과 편의가 속임수이며, 권력이 우리에게 보장하는 것들이 바로 속임수인 셈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속임수가 만연합니다. 그리고 이 속임수를 통해서 의로운 이들이 무너지게 되는 셈입니다. 예수님 앞에 선 이 ‘고위층’들도 마찬가지 계략을 짜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속임수’를 통해서 예수님을 무너뜨리고자 했습니다.
군중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군중’이었습니다. 이들은 군중을 바닥에 양탄자처럼 깔고 그 위에 서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두려운 것은 바로 군중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어느 형제를 깔고 그 위에 있는 이들은 바로 이 복음 구절의 율법학자와 수석 사제들이 하려는 일과 같은 일을 하는 셈입니다. 이들은 누군가의 위에서 그들을 깔아 뭉개며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행여 우리 가운데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면 얼른 내려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향유를 부은 여자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쏟아부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에 몇 사람이 불쾌해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재화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이 ‘아까워’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 여인의 마음 속에 있는 그 나르드 향유보다도 더 향기로운 ‘믿음’과 ‘사랑’이라는 기름은 전혀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온전히 ‘장님’이었던 셈이지요.
가난한 이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한 이들 타령을 합니다. 그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도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 부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헌신합니다. 본당마다 사회복지회가 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이런 저런 것들을 보살펴 줍니다. 하지만 그 근본 목적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이유는 ‘복음선포’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알리고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그들의 궁핍함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들이고 따라서 예수님에게 마음을 돌릴 여유가 없기 때문에 교회가 나서서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지 단순히 그들이 물질적으로 풍요해지기를 바라고 돕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여인의 봉헌 행위처럼 자신의 신앙을 순수하게 드러낸 기부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신자들의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서 교회에 거룩한 기물을 마련하는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다의 배신
그러는 가운데 유다가 조용히 홀로 움직입니다. 유다에 관해서는 이러저러한 이론의 여지가 많습니다. 하지만 유다의 배반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현실이기에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상상을 해 보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유다는 분명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아 넘겼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에 대한 질문을 여러가지 면에서 던져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른 복음서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데 유다는 아무래도 돈 욕심이 있었고,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배경은 우리도 잘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도 돈 욕심이 있고, 예수님의 본질적인 가르침(수난, 죽음,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에 똑같은 행위에 빠져들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전에 없던 ‘예언’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짜여진 판을 보고 있는 듯이 예수님께서는 행동 하나하나를 지시하시면서 제자들을 보내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혹시 모든 것은 미리 ‘짜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한 편으로 맞는 말이고 다른 한 편으로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돈 욕심이 하나도 없는 사랑이 가득한 사람을 만날 적에 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욕심이 엄청 많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청을 할 때에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면이 뒤바뀌지 않는 이상은 우리의 짐작대로 일어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신적 지혜에 덧붙여 하느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앞길 역시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제자의 배신 예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동요했지만 유다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유다가 다시 마음을 돌이키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신의 고집을 바꾸지 않습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어지간히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그 동안 동행하면서 그 권능을 지켜봐 온 분의 입에서 이런 저주의 말이 나오는데도 뉘우치지 않고 배길 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고집은 더욱 굳어져 버렸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일어납니다. 술을 마시지 말라고,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는 말들, 어떤 죄스런 결과가 예상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들으면서 웃어 넘겨 버리고 맙니다. 그런 우리의 고집에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유다와 우리의 자화상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성찬례의 제정
미사가 탄생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시면서 당신의 ‘몸과 피’로 선포하시고 우리는 그 예식을 ‘미사’를 통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미사 가운데에는 사제의 인격을 통해 예수님은 현존하시고 여전히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십니다. 절대로 미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몇 번이고 강조를 해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배반 예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반 역시도 예고를 하십니다. 하지만 철없는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장담을 합니다. 우리 역시도 일이 잘 되어갈 때에는 어떤 장담이든 곧잘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그 모든 이유는 하느님의 은총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언제나 하느님 앞에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겟세마니에서 기도
예수님은 슈퍼맨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모든 일어날 일을 보고 미리 파악하고는 계셨지만 그것을 아무런 감정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처럼 인간으로서 나약하셨고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을 청하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마지막 의지만큼은 아버지 앞에서 굽히십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믿음, 희망, 사랑’의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가지 덕목으로 세상을 의미하는 제자들을 벗어나 아버지 앞으로 더욱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조금 더 나아가’시어 땅에 엎드리는 ‘겸손과 순명’을 이루십니다. 그러는 중에도 예수님은 당신의 청을 드립니다. 당신은 아무런 감정도 바램도 없는 로봇이 아니었고 당신이 원하는 바가 뚜렷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난의 시간이 비켜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의지는 하느님에게 봉헌을 하신 셈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도 하느님 앞에 나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세가지 복음 삼덕,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 ‘겸손과 순명’으로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것을 모조리 청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주님의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하지요. ‘당신 뜻대로’.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쁘게 맞이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수면
잠을 자는 이들의 특징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제자들은 육체적인 피로로 인해 잠을 자고 있었지만, 이는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꿈’에 젖어 있는 이들이라서 영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질에 맛들인 이들은 잠을 자는 이들입니다. 육적인 쾌락에 빠져 사는 이들도 잠을 자는 이들입니다. 세상이 건네주는 명예와 권력에 빠져사는 이들도 잠을 자는 이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수난을 당하려고 하는 찰나에 우리는 여전히 이런 잠을 즐기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의 영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하지만 우리의 육은 너무나도 나약하여 끊임없이 잠자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잠에서 깨어 머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 뿐입니다.
잡히시다
이제부터는 실질적인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마치 눈 앞에 드러나는 일을 서술하듯이 복음서의 서술 방법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일은 무척이나 긴박하게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안에 들어있는 영성적인 의미를 파악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칼과 몽둥이
칼과 몽둥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육신을 제압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도구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 위용을 떨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육과 함께 머물러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이 칼과 몽둥이의 위력 앞에 눌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칼과 몽둥이의 한계는 거기 까지라는 것을 말이지요. 칼과 몽둥이는 절대로 우리의 영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덧붙여 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온 이들을 보낸 이들은 ‘수석 사제, 율법 학자, 원로’들입니다. 이런 세상의 지위 역시도 우리를 외적으로는 제압할 수 있지만 우리 내면의 영은 절대로 제압할 수 없습니다.
입맞춤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친밀함을 표현하는 행위로 배반자는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입을 맞추려면 상대가 저항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제자의 입맞춤을 받아 들입니다. 이는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었던 셈입니다. 배반하러 온 제자의 입맞춤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을지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귀를 자름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그를 꾸짖고 오히려 그 귀가 잘린 종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폭력을 쓰는 자들과 같은 수단으로 맞서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한 젊은이가 아마포만 두른 채 그분을 따라가다가 사람들이 그를 붙잡으려 하자 그마저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을 칩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니지 못한 세속 사람이 마지막까지 쥘 수 있는 마지막 재산과 자존심마저 버리고 그는 ‘생명’을 지키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 반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러 가십니다.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옷을 벗기우면서도 생명을 구하러 달아날까요? 아니면 예수님처럼 생명을 바치러 나아갈까요? 묵상해 볼 주제입니다.
신문
모든 고위 신분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맞설 수 있는 다른 진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거짓’을 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마저도 서로간의 의견이 들어맞지 않는 꼴을 보입니다. 마치 바벨탑에서 일어난 장면을 다시 재현해 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느님의 권위에 대적하기 위해서 서로 힘을 모아 탑을 쌓아 올리지만 결국 말이 뒤섞여 버리는 그들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거짓에 단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다 ‘네가 메시아냐?’라는 대사제의 질문에 의연히 대답을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예수님의 이 증언은 우리가 진정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뒤에 드러나는 그분의 말씀은 더욱 진실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 역시도 이해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 일이 일어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이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대사제도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신비’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사제는 이를 ‘신성모독’으로 해석해 버리고 맙니다. 자신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서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치부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른 한 편, 오늘날에 이를 흉내내려는 어리석은 이들과 그것을 추종하는 추종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적 계시는 마감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알지 못할 말들을 지껄이는 이들이 하나씩 둘씩 생겨나고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그들을 따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롱
침과 주먹과 뺨을 때림. 육체적인 고난도 고난이지만 예수님의 가장 기본적인 인격도 모독을 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모독의 단 한 부분도 견디질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들, 특히 악인들에게 당하신 모독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제 아무리 우리를 저 땅바닥으로 끌어내려 내동댕이친다 하더라도 그리 억울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부인
죽음을 불사하고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던 베드로, 이제 그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3번 부인하게 됩니다. 3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완전성을 담고 있는 숫자이지요. 베드로는 이로써 예수님을 완전히 부인한 셈입니다. 그리고 곧 닭의 울음 소리를 듣고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뉘우쳐 울기 시작합니다.
유다에게 주어진 경고와 베드로에게 주어진 경고, 이로써 둘은 결국 같은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두 인물 모두 예수님을 배반했고 배반과 더불어 예수님의 경고도 받은 셈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완전히 넘겨버린 반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미리 건네신 말씀을 상기하고 뉘우쳐 울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에 두 인물의 극적인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글: 마진우 신부, 겸손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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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부의 성경강의] 마르코 복음 15장
빌라도의 신문
예수님의 죽음에 결정권을 가진 인물, 빌라도입니다. 예수님과 빌라도의 심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울림과 이성을 마주한 느낌입니다. 가난한 한 사람을 두고 우리의 내면은 그를 도와야 한다고 부르짖고 우리의 이성은 온갖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면서 그 내면의 소리를 의심하고 추궁합니다. 그리고 최종 결정을 하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앞에 둔 빌라도도 자신의 이성적인 면을 최대한 이용해서 그분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이상하게’는 생각해도 그분에게서 그 어떤 범죄의 혐의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빌라도와 군중
이에 빌라도는 군중의 힘을 빌고자 합니다. 군중은 이미 이성도 잃어버린 존재임에도 빌라도로서는 다른 데에 힘을 얻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의 이성이 보다 내밀한 신비적인 면을 앞에 두고 자꾸 세상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합당한 의견을 도출해 내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거룩한 일’을 앞에 두고는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미사를 드리면서 과연 저것이 진정 예수님의 몸과 피일까 의심을 하고, 기도를 드리면서 과연 이 기도가 정말 어떤 역할을 할까 의심을 하고, 사제를 대하면서도 과연 이 인간에게 정말 신적인 권능이 부여되어 있는 걸까 의심을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이루신 하느님 앞에 가서 겸손되이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에 전혀 무지한 ‘군중’들, 즉 세상으로 돌아가 의견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선동하는 것이지요.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을 죽이는 일에 찬동하는 것입니다.
바라빠
반란 때에 살인을 저지른 반란군이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의 죄는 명백한 것이었고 빌라도로서는 그를 잡아 두는 것이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그냥 풀어주게 될 것이라는 결과를 예상하고 군중 앞에 예수와 바라빠를 내어 놓습니다. 빌라도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의 ‘시기심’의 결과로 붙잡혀 온 것을 말이지요. 하지만 군중들은 미친듯이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는 이 우매하고 절도없는 ‘군중’에게 항복하고 맙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두고 영적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나갈 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가 그 의견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 앞에 절실히 매달리거나 합당한 영적 지도자에게 문의해야 합니다. 이혼하려는 두 사람의 의견을 들고 세상 법정에 가면 ‘갈라섬’을 도와줍니다. 하지만 올바른 양심을 지닌 사제 앞에 가면 ‘둘 다 사는 법’을 도와줍니다. 과연 우리는 무슨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 어디에 조언을 구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멀쩡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바라빠를 살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군사들의 조롱
군사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경배’의 행위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구약에 이미 예고되어 있던 바이지요. 세상의 진정한 왕 앞에서 모든 존재들은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경배 행위는 지독히도 모독스런 것이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조롱과 모욕을 꿋꿋하게 참아 견디십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알면 알수록 이 세상에서 당하는 수모에 더욱 튼튼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들이 거룩하신 한 분의 뜻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압니다. 우리는 수난 당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을 얻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
군사들은 시골에서 올라오는 한 남성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웁니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로 십자가를 걸머쥐게 된 그는 주님과 함께 수난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런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면서도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이들이지요.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선행에 대한 상급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동족 유다인이면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던 이들이 그분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십자가에 못박아버린 한 편, 예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하던 이는 그분을 도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종교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천지의 창조주를 공경하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수난을 기꺼이 받아 쥐는 이들은 바로 이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수난 길에 동참하는 것이고 그 상급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입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
일종의 마취제로 쓰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혼미한 정신으로 비껴가게 하기를 바라지 않고 온전히 모두 감싸 안으시기를 바라십니다. 아주 작은 고통이라도 피하려고만 하는 우리들이 잘 성찰해 보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가까이 다가섰을 때에 우리에게 마땅히 다가올 수난의 시간을 기꺼이 끌어안을 수 있게 될까요?
십자가
당시의 가장 처참한 사형도구인 십자가는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들에게만 쓰여졌던 것이었습니다. 가장 사랑 가득하신 분이 가장 최악의 살인도구에 매달리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군사들은 그분의 마지막 소유물이었던 옷가지들마저 제비뽑기를 해서 가져갑니다. 한 마디로 탈탈 털어간 셈이지요. 예수님은 온전히 발가벗겨져서 매달려 계십니다. 온갖 수치와 조롱과 고통을 한 몸에 받고 계십니다. 죽기 직전의 그 순간도 조롱의 시간은 그치질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가와 ‘너 자신이나 구하라’며 조롱을 합니다. 심지어는 그분 곁에 같이 못박힌 이들도 조롱을 그치지 않습니다.
죽음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아버지의 알수 없는 뜻에 따르긴 하지만 성자이신 예수님 마저도 그분의 위대하신 뜻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부와 온전히 일치해 있었지만 그분은 아니었습니다. 이 삼위일체의 오묘한 신비는 우리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이 순간 분명히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기에 안심할 수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예수님에게 일어난 완전한 절망은 분명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적셔 주며 예언의 말씀을 완성하고(아마 이 끔찍한 순간 – 인간의 마지막 애정이 신 포도주로 다가오는 순간을 통해서 예수님은 다시금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숨을 거둡니다.
- 잠시 묵상 -
이때에 성전 휘장은 갈라집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던 유일한 막이 제거된 셈이지요. 우리들은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영원’에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죽음’은 정복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영원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에 백인대장이 신앙고백을 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여인들
멀리서 여자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의 여인들의 위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의 사랑은 오늘날에도 계속됩니다. 제자들은 모조리 도망가고 정작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는 특권은 여인들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곧잘 직분의 차이를 두고 남성과 여성을 차별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의 시대에 남자와 여자의 차별은 여전히 상존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직분에 있어서 남성들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여성들의 직분이 있고, 남성들에게만 부여된 직분이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자면 여성들은 예수님을 시중들수 있는 특권과, 그분의 가장 큰 고난 가운데 그분 곁에 머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는 셈입니다. 보는 시야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겠지만 이는 분명한 여성들의 특권입니다.
묻히시다
명망있는 의회 의원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 용기를 냅니다. 빌라도에게 다가가서 그분의 시신을 청하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알아본 후에 시신을 내어 줍니다. 빌라도의 마지막 역할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지성은 거룩한 것의 ‘죽음’의 모습 외에는 다른 것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신비’를 파악할 능력이 없고 그저 일어난 일의 사정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지닌 ‘믿음’은 용기를 내게 하고 자신의 명망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믿음은 이성을 앞서는 셈입니다. 믿음이 있던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은 그 거룩한 시신을 고이 싸서 새로 만든 무덤에 안치합니다. 그러는 동안 두 여인, 또 다른 믿음을 지녔던 이들이 그 광경을 지켜봅니다. 믿음은 거룩함의 존재를 알아보는 셈입니다. 이 예수님 시신의 안치로 그분의 죽음의 장면들이 마감됩니다.
글: 마진우 신부, 겸손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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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30일 수요일
매일미사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루카 13,24)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7-28)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시편 105,3-4)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제 눈을 비추소서. (시편 13,4)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시편 13,6)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셨네.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놓으시어, 하느님께 향기로운 예물로 바치셨네. (에페 5,2 참조)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바로 지금이 하느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의 때이며, 올바로 살아가도록 결단을 내리고 노력해야 하는 때라는 뜻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의 공동체 안에서 친교를 나누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신앙인으로서의 올바른 생활이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2019년 10월 22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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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1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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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4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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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2일 토요일
2019-95.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동영상 57
프란치스코 교황 지음
진슬기 옮겨 엮음
임의준 그림
가톨릭출판사 www.catholicbook.co kr
대출. 서초구립반포도서관
읽음. 2019년 10월 12일(토) ~ 32p
2019년 10월 15일(화) ~ 36p
2019년 10월 16일(수) ~ 86p 집. ~ 360p 끝. 서초구립반포도서관
15p. "Coraggio avanti(용기를 가지고 앞으로!)
27p. 예의란 증오를 없애고, 사랑을 유지시킨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27p. 바로 집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요.
31p. 우리 모두 죄인이니까요.
37p. 매일 신선하고 따뜻한 그 사랑을 더해 주시는 것이지요. 더욱이 이는 무한정 공급됩니다.
37p. 예수님께 여러분의 사랑을 더해 주십사고 청하는 것입니다.
37p. "주님, 저희에게 매일매일 일용할 사랑을 주십시오."
44p. 주님을 여러분 집에 한 가족으로 들어오게 하세요. 그러면 그분께서는 늘 함께하시며 여러분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54p.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54p.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마세요. 따르기 위해서는 바라보는 것이 필수입니다.
64p. 결혼은 온 생애에 걸쳐 항상 '손에 손을 잡고' 가는 것입니다.
68p. 매일매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70p.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73p. '사람'과 '사랑', 그러니까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77p. 우리가 그분께로 다가갈 때, 그분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이 먼저 기다리곺계신 것입니다!
77p. '주님은 항상 먼저(primerea)이십니다.'
89p. 넘어지면 곧바로 다시 일어나 가던 길을 계속해서 걸어 나가면 되니까요!
91p.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2-43)
98p. 청하는 것보다 늘 더 많이 채워 주시지요.
101p. 사실 '자캐오'라는 이름은 그 어원으로 보자면 매우 좋은 의미릏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참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114p. 분명 그들이 고통은 언젠가 끝나게 됩니다. 고통은 영원한 것이 아니죠.
120p. 예수님은 섬기는 분이 되셨습니다. 봉사자가 되셨지요. 그분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더 낮아지기를 원하셨습니다.
125p.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저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270p. 우리는 십자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우리의 희망을 두고 있어야하지요!
279p. 하느님은 늘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290p. "하와의 불순종으로 묶인 매듭이 마리아의 순종을 통하여 풀렸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56항)
299p. 신앙의 여정은 십자가를 통과해서 지나갑니다. 성모님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를 감내하셨지요.
301p. 우리는 당신의 그 강하고 겸손한 믿음에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우리는 당신께 새롭게 의탁합니다. 믿음의 어머니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334p. 스테파노 성인은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살해하는 자들의 용서를 빌며 죽습니다.
347p. 주님이 나를 보신다! 주님이 나를 보고 계시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