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31일 목요일

[마신부의 성경강의] 마르코 복음 15장

 빌라도의 신문

예수님의 죽음에 결정권을 가진 인물, 빌라도입니다. 예수님과 빌라도의 심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울림과 이성을 마주한 느낌입니다. 가난한 한 사람을 두고 우리의 내면은 그를 도와야 한다고 부르짖고 우리의 이성은 온갖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면서 그 내면의 소리를 의심하고 추궁합니다. 그리고 최종 결정을 하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앞에 둔 빌라도도 자신의 이성적인 면을 최대한 이용해서 그분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이상하게’는 생각해도 그분에게서 그 어떤 범죄의 혐의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빌라도와 군중

이에 빌라도는 군중의 힘을 빌고자 합니다. 군중은 이미 이성도 잃어버린 존재임에도 빌라도로서는 다른 데에 힘을 얻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의 이성이 보다 내밀한 신비적인 면을 앞에 두고 자꾸 세상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합당한 의견을 도출해 내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거룩한 일’을 앞에 두고는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미사를 드리면서 과연 저것이 진정 예수님의 몸과 피일까 의심을 하고, 기도를 드리면서 과연 이 기도가 정말 어떤 역할을 할까 의심을 하고, 사제를 대하면서도 과연 이 인간에게 정말 신적인 권능이 부여되어 있는 걸까 의심을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이루신 하느님 앞에 가서 겸손되이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에 전혀 무지한 ‘군중’들, 즉 세상으로 돌아가 의견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선동하는 것이지요.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을 죽이는 일에 찬동하는 것입니다.

 

바라빠

반란 때에 살인을 저지른 반란군이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의 죄는 명백한 것이었고 빌라도로서는 그를 잡아 두는 것이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그냥 풀어주게 될 것이라는 결과를 예상하고 군중 앞에 예수와 바라빠를 내어 놓습니다. 빌라도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의 ‘시기심’의 결과로 붙잡혀 온 것을 말이지요. 하지만 군중들은 미친듯이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는 이 우매하고 절도없는 ‘군중’에게 항복하고 맙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두고 영적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나갈 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가 그 의견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 앞에 절실히 매달리거나 합당한 영적 지도자에게 문의해야 합니다. 이혼하려는 두 사람의 의견을 들고 세상 법정에 가면 ‘갈라섬’을 도와줍니다. 하지만 올바른 양심을 지닌 사제 앞에 가면 ‘둘 다 사는 법’을 도와줍니다. 과연 우리는 무슨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 어디에 조언을 구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멀쩡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바라빠를 살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군사들의 조롱

군사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경배’의 행위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구약에 이미 예고되어 있던 바이지요. 세상의 진정한 왕 앞에서 모든 존재들은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경배 행위는 지독히도 모독스런 것이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조롱과 모욕을 꿋꿋하게 참아 견디십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알면 알수록 이 세상에서 당하는 수모에 더욱 튼튼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들이 거룩하신 한 분의 뜻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압니다. 우리는 수난 당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을 얻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

군사들은 시골에서 올라오는 한 남성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웁니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로 십자가를 걸머쥐게 된 그는 주님과 함께 수난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런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면서도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이들이지요.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선행에 대한 상급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동족 유다인이면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던 이들이 그분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십자가에 못박아버린 한 편, 예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하던 이는 그분을 도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종교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천지의 창조주를 공경하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수난을 기꺼이 받아 쥐는 이들은 바로 이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수난 길에 동참하는 것이고 그 상급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입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

일종의 마취제로 쓰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혼미한 정신으로 비껴가게 하기를 바라지 않고 온전히 모두 감싸 안으시기를 바라십니다. 아주 작은 고통이라도 피하려고만 하는 우리들이 잘 성찰해 보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가까이 다가섰을 때에 우리에게 마땅히 다가올 수난의 시간을 기꺼이 끌어안을 수 있게 될까요?

  

십자가

당시의 가장 처참한 사형도구인 십자가는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들에게만 쓰여졌던 것이었습니다. 가장 사랑 가득하신 분이 가장 최악의 살인도구에 매달리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군사들은 그분의 마지막 소유물이었던 옷가지들마저 제비뽑기를 해서 가져갑니다. 한 마디로 탈탈 털어간 셈이지요. 예수님은 온전히 발가벗겨져서 매달려 계십니다. 온갖 수치와 조롱과 고통을 한 몸에 받고 계십니다. 죽기 직전의 그 순간도 조롱의 시간은 그치질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가와 ‘너 자신이나 구하라’며 조롱을 합니다. 심지어는 그분 곁에 같이 못박힌 이들도 조롱을 그치지 않습니다.

 

죽음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아버지의 알수 없는 뜻에 따르긴 하지만 성자이신 예수님 마저도 그분의 위대하신 뜻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부와 온전히 일치해 있었지만 그분은 아니었습니다. 이 삼위일체의 오묘한 신비는 우리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이 순간 분명히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기에 안심할 수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예수님에게 일어난 완전한 절망은 분명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적셔 주며 예언의 말씀을 완성하고(아마 이 끔찍한 순간 – 인간의 마지막 애정이 신 포도주로 다가오는 순간을 통해서 예수님은 다시금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숨을 거둡니다.

 

- 잠시 묵상 -


이때에 성전 휘장은 갈라집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던 유일한 막이 제거된 셈이지요. 우리들은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영원’에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죽음’은 정복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영원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에 백인대장이 신앙고백을 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여인들

멀리서 여자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의 여인들의 위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의 사랑은 오늘날에도 계속됩니다. 제자들은 모조리 도망가고 정작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는 특권은 여인들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곧잘 직분의 차이를 두고 남성과 여성을 차별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의 시대에 남자와 여자의 차별은 여전히 상존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직분에 있어서 남성들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여성들의 직분이 있고, 남성들에게만 부여된 직분이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자면 여성들은 예수님을 시중들수 있는 특권과, 그분의 가장 큰 고난 가운데 그분 곁에 머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는 셈입니다. 보는 시야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겠지만 이는 분명한 여성들의 특권입니다.

  

묻히시다

명망있는 의회 의원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 용기를 냅니다. 빌라도에게 다가가서 그분의 시신을 청하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알아본 후에 시신을 내어 줍니다. 빌라도의 마지막 역할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지성은 거룩한 것의 ‘죽음’의 모습 외에는 다른 것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신비’를 파악할 능력이 없고 그저 일어난 일의 사정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지닌 ‘믿음’은 용기를 내게 하고 자신의 명망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믿음은 이성을 앞서는 셈입니다. 믿음이 있던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은 그 거룩한 시신을 고이 싸서 새로 만든 무덤에 안치합니다. 그러는 동안 두 여인, 또 다른 믿음을 지녔던 이들이 그 광경을 지켜봅니다. 믿음은 거룩함의 존재를 알아보는 셈입니다. 이 예수님 시신의 안치로 그분의 죽음의 장면들이 마감됩니다.

 

 

글: 마진우 신부, 겸손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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