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8일 월요일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는 이곳저곳에서 강의 부탁을 많이 받습니다. 제가 필요하다고 하시니 어떻게 안 가겠습니까? 그래서 시간만 허락한다면 무조건 강의 부탁에 승낙을 합니다. 하지만 강의를 가서 종종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강의를 하기 위해서 앞에 섰을 때, 전에 제가 강의하는 것을 들으신 분이 또 그 자리에 앉아 계실 때입니다. 그 순간에 긴장이 됩니다. 물론 강의 내용을 매번 다르게 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몇 가지 내용을 그대로 쓸 수밖에 없을 때가 있거든요. 이러한 당황함을 표시하지 않고 그분께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제 강의를 자주 들으러 오시나 봐요. 지난 번 *** 성당에서도 뵈었던 것 같은데, 맞죠? 그런데 어떻게 하죠? 지난 번 강의와 똑같은 내용도 있을 텐데, 이것을 두고 저를 흉보시지는 않을까봐 걱정되네요.”

 

그랬더니 이분께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어제 일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리고 다 좋은 말이라서 백 번 들어도 좋답니다.”

 

이 분 말씀에 얼마나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빠다킹 신부 강의는 매번 똑같아서 들을 것이 없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몇 번 들어도 상관없다는 말씀에 더욱 더 힘을 내서 강의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힘을 빼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내 이웃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사랑을 늘 강조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힘을 빼는 것이 아니라 힘을 주는 존재로 생활하시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모습을 더 간직하고 계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꾸짖는 사제와 율법학자들을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돌보아야 할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힘든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들이 이 세상 안에서 힘차게 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사랑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사랑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커다란 짐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있다면서 ‘불행선언’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힘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힘을 빼는 존재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종교지도자들의 몫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즉, 힘을 빼는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아니라, 내 이웃들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되어 ‘행복선언’의 주인공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주인공이 되시겠습니까?

 

 

오늘의 명언: 행복은 습관이다. 지금 이 순간을 음미하기, 작은 일에 감사하기, 타인에게 관대하기, 눈을 돌려 꽃, 하늘 등 자연을 바라보고 감탄하기...(베르하르트 슐링크)

 


내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

 

미국을 대표하는 코미디언, 배우, 작가, 제작자인 휘트니 커밍스(Whitney Cummings)는 말합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나 자신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먼저 바라보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 연약함과 취약함을 상대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다. 상대의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서다. 그래서 그토록 집요하게 남들의 모습을 파고들고 판단하는 데만 열중하다가 오히려 큰 상처를 입는다. 마음껏 부드러움과 연약함, 취약함을 드러내라. ‘나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라고 말하면 상대는 마음을 연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상대는 더 활짝 마음을 연다. 내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은 타인을 따뜻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남의 힘을 빼앗을 때에는 자기 스스로의 힘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나 남에게 힘을 주는데 노력하면 내 자신도 모르게 힘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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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8일 금요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어제는 구요비 욥 주교님의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나를 따르라.’라는 성서의 말씀을 주교님의 사목표어로 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하시면서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요비 주교님께서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따르겠다는 의미로 사목표어를 ‘나를 따르라.’로 정하셨습니다. 이는 세례를 받은 모든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히 따라갈 수 있도록 주교님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보름동안 선교 사제를 방문하고, 선교 체험을 하는 신학생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적응하는 신학생들을 보니 반갑고, 대견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신학생들은 먼저 4개월 동안 주교님과 함께 지내면서 어학연수를 하였습니다. 주교님으로부터 영적인 도움을 받았고, 2개월 동안 현지 본당에서 본당 사목을 도와 드렸습니다. 먼저 기본을 다지고 현지로 파견을 나갔습니다. 모판에서 싹을 틔운 다음 논으로 벼를 옮겨 심는 것 같았습니다.
페루에서 신학생들은 별도의 어학연수를 가지지 않고, 현지의 본당과 가정으로 파견 되었습니다. 신학생들은 따로 문법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마치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듯이 조금씩 적응하였다고 합니다.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 주었고, 급식소에서 밥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비록 말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전해졌고, 떠나는 날에는 아이들도, 신학생들도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저는 신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2가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꼭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을 배우는 것은 방법과 이론도 중요하지만 열정과 갈망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열정과 갈망이 없으면 좋은 환경에서도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열정과 갈망이 있으면 거친 사막에서도 꽃이 피기 마련입니다. 격려와 위로를 주기 위해 떠난 여정이지만 열정과 갈망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사제가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독신생활에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이지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1년이 지나도록 한번 입지 않는 옷도 있습니다. 몇 년 째 듣지 않는 음반도 있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포기하지 못하는데 주님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을 버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여행을 가면 따로 방을 마련해 주시는 교우들의 배려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다른 분들은 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사제라는 이유로 음식을 갖다 줄 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자가용으로 모시러 오고, 모셔다 드려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아니라고 지하철 타고 버스타고 간다고 말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독신으로 사는 것은 필요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인을 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조재형 2017-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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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1일 금요일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

 8월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

 

클라라 성녀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분 계십니다. 가난과 겸손의 성인이자 제2의 예수 그리스도라 불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십니다.

 

그가 지녔던 인간적 성품, 그가 추구했던 가치관, 그가 소유했던 신앙과 삶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던지 당대 수많은 청년들이 그와 같은 길을 걷고자 세상을 등졌습니다. 클라라 역시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란 인물과 그가 주도한 가난을 통한 영적 쇄신 운동에 흠뻑 매료된 클라라 역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세상을 등졌습니다. 귀족 가정 출신 자녀로서의 풍요와 특권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상속재산도 자발적으로 포기했습니다. 그 단호한 결정들이 모두 영적 스승이자 사부이신 프란치스코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출가 이후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제시한 영적 여정을 단 한 치 오차도 없이 충실히 따랐습니다. 클라라의 영성은 프란치스코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가난과 겸손과 사랑입니다.

 

그녀가 자주 강조한 것은 그냥 가난이 아니라 겸손과 함께 하는 가난, 그리고 동시에 가난과 함께 하는 겸손이었습니다.

 

그녀의 생애 안에서 가난과 겸손은 다정하게 손을 잡았습니다. 그녀 안에서 이루어진 철저한 가난과 겸손의 실천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그리스도의 사랑에로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클라라의 삶이 스승 프란치스코와 다른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녀는 봉쇄구역 내에서 프란치스코 영성에 따라 관상 수도생활을 해나간 것입니다.

 

그녀가 평생토록 관상 수녀회 안에서 끊임없이 바라본 것은 프란치스코가 바라본 것과 동일입니다. 곧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동시에 성체 안에 머물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런 클라라 성녀에게서 사람들은 ‘복사판 프란치스코’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또는 ‘제2의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의 영혼에서 나온 여인’, ‘프란치스코의 거울’, ‘프란치스코의 여성적 얼굴’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일컬어 ‘복되신 스승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즐겨 불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제 개인적으로 제2의 프란치스코 시대라고 부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베르골리오 추기경을 ‘종들의 종’인 교황으로 선택하셨고, 그분은 당신의 교황 명을 프란치스코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교황님께서는 온몸과 마음을 다해 가난과 겸손의 삶을 전 세계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난과 겸손으로 무장한 제2의 프란치스코로서 물질만능주의와 경제지상주의에 물들어있는 이 세상에 맞서 외로운 영성쇄신운동을 펼치고 계신 것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그러했듯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가난과 겸손만이 현재 우리 교회가 살아날 유일한 탈출구로 여긴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정신이나 이상, 영성으로만 추종한 것이 아니라, 100% 있는 그대로, 실제로, 구체적으로,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심이후 한 평생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했습니다. 완벽한 가난의 실천을 가로막는 무수한 장벽들과의 피나는 투쟁이 그의 일생이었습니다.

 

클라라의 삶 역시 사부 프란치스코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복사판’이었습니다. 클라라의 삶은 마치 프란치스코의 삶의 거울과도 같은 삶이었습니다. 가난과 겸손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이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 나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바라봅니다.

 

아무것도 아쉬울 것 없는 풍요롭고 안락한 삶, 가난의 영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활,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조금도 연대하지 않는 모습을 부끄러워합니다. “자매들은 집이나 거처, 그 어떤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가난과 겸손 안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신뢰심을 가지고 구걸하러 보낼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난해지셨으니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클라라의 수도규칙)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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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4일 금요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마태 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루카 6,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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